7평이 채 안 되는 자취방 암막 커튼을 걷으려다 이상하리만치 눈이 부셔서 다시 커튼을 닫는다. 강찬희는 일으켰던 몸을 뒤집어 이불 속으로 재차 파고들었다. 눈이 계속 오네. 잠결에 든 생각이었다. 그래서 좋다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싫은 것도 아니고. 아침에 눈을 뜨며 들이마시는 공기의 온도가 확연히 낮아졌음을 실감하게 될 즈음, 몇 번 정도는 일기예...
살과 뼈마디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농구공이 코트를 때리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걸 쳐맞는 중인 쟨 알까. 뻑, 소리와 함께 지 두배 정도 될 것 같은 덩치를 온 어깨로 밀어낸 안영수가 다부지게 말아쥔 주먹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갈긴다. 종합 운동장에서 아파트 단지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루트는 술집이 즐비한 번화가 골목을 곧바로 가로지르는 길이다. ...
상혁아. 우리 그냥 1인 기획사 차릴까. 상혁은 종종 어떠한 기억을 평생 간직하고 싶은 동시에, 영영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중한 이의 기억을 팬던트에 보관해, 언제든 꺼내 보세요!> 소속사에서 연계해준 상조 업체의 부가서비스 목록에서 그런 타이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인드맵 백업은 비용이 많이 들어. 이식 수술 하기 전까진 ...
천축서 연대에 해방을! 이건 우리 천축서의 의지야 기니피그 장로들이 다급히 손을 흔듭니다. 테리의 손바닥만한 힙색 안에는 새끼 기니피그들이 정성을 다해 모은 귀중한 씨앗과, 청년들이 힘을 합쳐 구한 게이트 통행권이 들어 있습니다. 이봐, 너는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의 죽음이, 개죽음이 아니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떠날 채비를 하던 마지막 날, 천축서과 청...
염색체 지적 설계 세대인 강찬희는 이미 출생 단계에서부터 지병을 비롯한 각종 유전병에 대한 가능성이 말소된 채 가장 나은 확률로 태어난 생명체입니다. 후천적 시술 및 생명연장술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특별한 외상이 없다면 강찬희는 가장 생생하고 젊은 육신을 유지한 채 60살 가량까지 생존할 수 있으며, 최대 수명은 200살을 웃돕니다. 그러니 지금 대강의...
김영빈은 손을 흔듭니다. 함께해서 좆같았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비좁은 창문 너머로 머리를 내밀고 외치자, 이사대행업체에서 온 미니언이 영빈을 향해 홀로그램 중지손가락을 출력합니다. 발품을 팔아 고용한 업체였으나 서비스 품질은 형편없습니다. 복도에 호되게 긁힌 공기청정기가 기스로 가득합니다. 영빈은 입술을 내밀었습니다. 집도 좁고 복도도 좁으니 성한 가구가...
모래바람은 일렁이며, 불투명한 게이트 너머의 세계는 희뿌옇습니다. 제 이름은 김영균, 보안관입니다. 공무원인 셈입니다. 그리고 제 왼편에 앉아 졸고 있는 양아치는 영빈이 형입니다. 형이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꾸벅 꾸벅 졸다가 데스크에 턱을 박는 장면이 보안 카메라에 빠짐 없이 녹화됩니다. 연봉 정산 시스템에 따라 영빈이형의 월급이 삭감됩니다. 오 예. 저...
발할라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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